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자르 왕조 (문단 편집) == 군사 == 카자르 왕조의 군사력은 페르시아의 덩치에 비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약했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가 즉위한 1850년대 페르시아의 중앙군은 겨우 3천여 명에 불과했다. 대규모 원정군을 꾸리기 위해선 지방 토후들에게 병사들을 꾸어와야 했고 중앙군은 지방군 세력에게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압도당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건 아니었다. 부족 세력이 강한 페르시아에서 군사력은 곧 왕조의 존립과 관계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아가 모하마드 칸]] 시절까지만 해도 중앙군의 위력이 대단한 수준이었지만, 이후 암군들이 연달아 전쟁에서 패배하고 군사력을 말아먹으면서 갈수록 약화된 것이다. 게다가 [[영국]]이나 [[러시아 제국]] 같은 서구 열강들도 카자르 왕조의 군사력을 최대한 빼놓는 데에 집중했기 때문에 1800년대 중반 이후의 페르시아 군사력은 보기 처참할 정도였다. 빈약한 페르시아 군대에서 그나마 봐줄만한 게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بریگاد قزاق)'이었다. 1879년 나스레딘 샤의 근대화 개혁 과정에서 탄생한 여단으로, [[러시아 제국]]의 [[카자크]] 연대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나스레딘 샤는 1878년 러시아 남부를 여행하면서 깊은 감명을 얻은 카자크 기병대를 페르시아에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나스레딘 샤는 러시아에서 장교를 초빙해 페르시아 병사들을 훈련하도록 시켰고, 이를 페르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로 여긴 러시아 측에서는 대단히 호의적으로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 증강에 도움을 줬다. 어찌나 러시아 장교들이 많았던지 1910년대 후반까지도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의 총사령관이 페르시아인이 아닌 러시아인이었을 정도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본국에 불이 떨어지자 그때서야 러시아 장교들이 대거 되돌아가며 페르시아인에게 코사크 여단의 지휘권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때도 완전한 페르시아 군대라 보기는 어려웠다. 러시아가 사라지자 그 자리를 [[영국]]이 빠르게 메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즉 '''코사크 여단은 페르시아 정규군이라기보다는 러시아의 도구에 더 가까웠다'''는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a44e1e5eb0e8b6bef0d4c26579aaeaa.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497533794_h-10679.webp|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ost-8734-0-54968800-1332798661.jpg|height=300]]}}} || || '''{{{#fff 코사크 여단의 지휘 장교}}}''' || '''{{{#fff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의 모습}}}''' || '''{{{#fff 코사크 여단의 고위 장교들}}}''' || 코사크 여단이 탄생하기 전 샤의 친위 부대는 훈련도 안하고 규율도 잡히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들에 불과했다. 보다못한 샤는 1879년 400명의 [[체르케스인]]과 무슬림 캅카스인들을 가려뽑아 코사크 여단을 창설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이 지나치게 빨리 발전하자 러시아의 통제에서 벗어날 것을 우려한 러시아가 소극적으로 변했고, 재정 부족으로 병사들에게 급료도 주지 못하는가 하면 수많은 병사들이 탈영하며 한때는 러시아 장교 1명, 병사 150여 명 수준까지 규모가 추락했다. 하지만 유능한 장교 코사고스키 대령이 러시아로부터 도착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코사고스키 대령은 기존 코사크 여단의 엘리트 의식을 박살내고 규율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규모도 확충하여 제대로 된 그럴듯한 군대를 재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나스레딘 샤가 살해당하자 코사크 여단이 [[테헤란]]을 점거, 새로운 샤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의 즉위에 [[킹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그 위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진다. 코사크 여단은 이후 샤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다. 1903년 코사크 여단의 규모는 러시아 장교 200명, 규모 1,500여 명에 달했다. 기형적일 정도로 러시아인 장교의 비율이 높았는데,[* 일반적인 기병대의 장교:병사 비율은 1:30이었다. 그런데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은 그 비율이 1:7.5 정도로 매우 컸다.] 이는 코사크 여단이 사실상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이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의 지휘권은 페르시아 정규군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러시아 사령관의 독점적인 지휘를 받았다. 이후 1906년 입헌 혁명이 터지자 코사크 여단은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를 왕좌에 앉히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모하마드 알리 샤가 의회를 폐지하려 시도하자 그의 충실한 종이 되어 의회를 포격하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민중군이 결국 코사크 여단과 샤를 쫒아내는데 성공하며 약간 기세가 주춤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이 페르시아인들보다는 [[러시아 제국]]의 의도에 훨씬 충실한 조직이었다는 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코사크 여단은 페르시아 전역에서 러시아의 대리인으로서 [[오스만 제국]] 군대와 전쟁을 벌였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그때 러시아 장교들이 대거 러시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러시아 장교들이 코사크 여단에서 빠지자 그 자리는 [[영국]] 장교들이 빠르게 꿰차고 들어오면서 페르시아인들에게 코사크 여단의 지휘권이 돌아가지는 못했다. 이후 1920년대 들어 카자르 왕조가 날로 망해가자 페르시아 내부의 거의 유일한 군사조직인 코사크 여단의 중요성은 급부상했다. 1921년 1월 14일 영국의 아이언사이드 장군이 [[타브리즈]] 대대를 이끌던 [[레자 샤 팔라비|레자 칸 팔라비]]에게 여단 전체의 통제권을 맡겼고, 그 직후 레자 칸 팔라비는 3~4,000여 명의 여단을 이끌어 [[테헤란]]을 점령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레자 칸 장군은 자신의 핵심 지지기반이었던 코사크 여단을 당연히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는 여단을 페르시아 정규군으로 완전히 편입시켰고, 이후 코사크 여단의 힘을 등에 업어 [[아흐마드 샤 카자르]]를 폐위시킨 뒤 자신이 직접 [[샤]]로 즉위했다. 카자르 왕조의 입장에서는 개혁의 결과로 만들어진 군대가 결국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자충수가 되어버린 셈이다. [[파일:Nav_Persepolis.png]] 카자르 해군의 유일한 [[순양함]]이었던 '페르세폴리스'. 나름 [[해군]]도 있었으나 역시 보기 민망할 정도로 빈약했다. 원래 페르시아는 그렇게 해군력이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해군력을 집중육성했던 [[나디르 샤]] 시절에는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갖추고 있었으며 바다 건너 [[오만 제국]]을 패퇴시키기까지 할 정도의 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카자르 왕조 시절들어 샤들이 해군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재정도 후달리자 자연스레 해군은 소멸하기 직전 수준까지 내몰렸다. 그나마 1885년에 [[독일]]로부터 순양함 '페르세폴리스'와 경비정 '수사'를 사왔지만 이마저도 초라했다. 페르시아 해군의 핵심이었던 순양함 페르세폴리스의 경우 2개의 돛대와 1개의 [[연돌]]. [[충각]]을 가지고 있는,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크지도 않은 소형함이었다. 1904년 페르시아 해군이 소유한 배는 이 두 척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1920년대 들어서는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 선박들이 페르시아 정부가 가지고 있는 가장 거대한 선박이었으며, 당대 페르시아의 해군력은 국제적으로 봤을때, 그리고 페르시아의 규모에 비하면 비참할 수준으로 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